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하고 새로운 습관을 가질 수 있다.
벌써 몇 년 전이지만 김메이글이라는 젊은이가 페이스북에 쓴 글에 자극을 받아 새벽예배에 나갈 수 있는 생활 습관을 갖게 됐다. 새해 계획은 당일에 시작하려 하지 말고 적어도 두 달 정도는 준비해 가면서 조금씩 행동을 바꿔야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원래 아침 잠이 많던 내가 하루에 1 분씩 일찍 일어나도록 해가면서 결국 매일 새벽 5 시 조금 넘어서 일어나는 습관을 지속하고 있다.
오랜만에 그런 종류의 생활 패턴을 바꾸게 될 것이라 예상하는 자극을 어제 아침에 우연히 보게 된 세바시 영상을 통해서 받게 되었다. 전혀 알지 못하던 이슬아라는 젊은 작가의 '글쓰기는 부지런한 사랑이다'라는 YouTube 영상이었는데 (https://www.youtube.com/watch?v=dr6z0JdcxbI&list=LL9hz0MiGRADhT13PGpncXnA&index=6&t=0s) 내 아들 또래의 젊은이인데도 존경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일기 쓰기를 권하는 talk는 아니었지만 나로서는 일기를 써야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글쓰기에는 마음을 부지런하게 하는 속성이 있다'라는 말이 나에게는 참으로 공감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글을 쓰다 보면 부지런해져야 하기 때문에 짐짓 귀찮아서 미뤄놓은 습관이 아닌가 싶다.
'글쓰기는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을 유심히 다시 보게 한다'는 말도 너무 공감이 가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나로 하여금 일기를 써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 것 같다. 이슬아 작가는 어린 시절 '아쉬움'이 일기를 쓰게 한 동력이라고 고백하였지만, 나는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보다 깊이 있는 신앙을 소망하며 일기를 써보고자 한다.
살아가면서 때때로 맞는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을 보존하는 글쓰기를 통해 '이야기의 수명'을 길게 할 수 있다는 말도 공감이 된다. 이미 쓰기 시작한 기도 응답 노트를 통하거나 이런저런 기록을 통해서 그런 기억을 적고 있기는 하지만 매일 쓰는 일기를 통해서 그러한 순간들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기를 기대한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일상 가운데 감사할 만한 일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런 것을 잘 '기억'하고 '선명하게(해상도가 높게)' 볼 수 있는 능력도 작가님처럼 생기기를 바란다.
'우리는 남에게서 들은 이야기 뿐 아니라 자기가 써놓은 이야기로 스스로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말도 새겨 들어야 할 명언인 것 같다. 어떤 다짐과 같은 것이리라. 내가 고백하는 믿음을 실천하는 것에 대하여 감시자와 같은 역할을 내가 남긴 글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쓰기 시작해 보려는 일기는 두 가지 형식을 병행하고자 한다. 흔히 시간을 얘기할 때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을 말하는데,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해 보고자 한다. 크로노스의 시간과 같이 연대기적으로 있었던 일들을 적으면서 떠오르는 단상을 적는 기록과, 카이로스의 시간과 같이 그 가운데 통찰된 일들은 좀 더 깊이 있게 적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오래 전에 이대 교목이시던 김흥호 목사님의 '사색'이라는 월간 출판물을 접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 끝부분에는 '오늘'이라는 꼭지로 일기를 몇 편씩 실으셨는데, 한 동네에 사시고 아드님인 김동건 교수님도 교회에서 늘 보던 선배라서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1972 년) 10 월 8 일. 대신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누가복음 10 장 25 절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읽었다. 제목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생각을 했다. 참고될 만한 책도 읽었다. 그러나 할 말이 없다. 그전 주간은 이 제목을 가지고 대학 교회에서도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통 말이 나오질 않았다. 설교 시간이 되었다. 아무 영감도 말의 실마리도 못잡은 채 단 위에 섰다. 다만 할 말이 없다고 호소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었다. 등골에 땀이 흘러 내렸다. 다만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힘없이 이런 말 저런 말을 했다. 이렇게 기막힌 일은 없었다. 설교하려 나선 사람에게 할 말이 없다. 30 분 동안 한없이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기도를 했다. 나도 안타까와서 목메인 소리로 호소하는 길 밖에 없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얻어맞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이날 나는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십자가 위의 경험을 몇 만분지 일이라도 경험할 수가 있었다. 모순과 갈등의 폭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서로 갈려서 하나는 기도가 되어 위로 올라가고 하나는 식은 땀이 되어 아래로 떨어진다. 교인들 가운데는 나에게 대하여 동정하는 얼굴도 있고 또는 조소하는 얼굴도 있었다. 한없는 부끄러움을 당한 것이다. 나는 한없이 괴로웠다. 10 월 9 일. 한글날이지만 나는 종일 누워서 고민하고 있었다. 살점을 에이는 것 같은 고민이다. 왜 영감이 끊어졌을까. 어떻게 하면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할 수 있을까. 내게는 끊임없는 이원론의 모순이 꼬리를 물고 돌아갔다. 한없이 괴로운 하루였다. 10 월 10 일. 아침 나에게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다. 영감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힘을 얻어 설교하고 싶은 의욕으로 마음이 부풀었다. 곧 대신교회에 연락하여 그 다음 주일 다시 설교를 하게 하였다. 영생이란 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는 일이다. 하나님의 영감은 불이 되어 이웃으로 불똥이 튄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둘이 아니다. 철이 들어 어른이 되듯이 인생은 영감을 얻어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 뿐이다.'
이런 경지에 이르는 일기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매일 적어가다 보면 나의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이 맞물려 나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비공개로 하겠지만 간혹 공개로 나의 경험을 공유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