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 바보 이반 (톨스토이)

KC Lee 2015. 8. 11. 18:07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 지음 / 방대수 옮김

책만드는집


책을 많이 읽지도 못하지만 그나마 즉흥적인 책 선정 수준에 머물러 있는 나의 독서 행태이기에, 제목이 눈에 띄어 지인이 소장한 이 책을 빌어다가 읽게 되었다. 무엇보다 톨스토이라는 저자의 명성이 한 몫 하기도 했는데,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과 같은 대작을 집필한 저자가 과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 궁금하였다. 제목이 상상케 하는 바는 인간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거창한 담론이지만 그에 대한 해답을 주기에는 매우 얇은 책의 두께가 의구심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단순히 설명될 수 없는 질문이기에 만족할 만한 수준의 답은 듣기 어려웠다는 것(그만큼 내가 이 소설에 대해 무지했다는 것), 그리하여 그 짧은 소설 가운데 뭔가 심오한 의미를 찾으려 한 것은 역시 나의 게으름의 소산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다. 즉, 제목은 심오하나 표현될 수 있는 작가의 생각은 단편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단편 소설의 한계었다.


이 단행본에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포함 세 개의 소설이 실려 읻는데, 모두 천사/악마/도꺠비와 같은 영적인 존재를 현실에 의인화시켜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는 신에게 벌을 받고 있는 천사가 아예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풀어 가고 있고,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는 주인공인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며 파멸로 이끌어 가는 악마가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하다가 마지막에 그 정체를 드러내며, '바보 이반' 역시 작은 도깨비들과 두목 도깨비가 등장하여 주인공과 대결하며 우리 전래 동화를 연상시키는 형태를 띄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재미는 있지만 지나치게 허구적인 것이라 일단 현실감은 떨어진다고 본다. 그러나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거리를 남기고 교훈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기에 가치가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우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미하일이라 이름하는 젊은이가 구두 수선공인 세몬의 집에 얹혀 살게 되면서 뛰어난 솜씨로 구두를 만들며 지내다가 두 손님을 맞으며 자기가 신에게 벌을 받으면서 답을 찾아야 했던 세 가지의 답을 찾게 된다는 내용이다.

첫 번째 질문인 '인간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될 것'에 대하여서는 처음 세몬의 집에 갔을 때 그의 처인 마트료나를 통해 '사랑'을 보게 된다. 두 번째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1 년 후 찾아 온 어떤 신사가 무례하게 1 년 동안 모양도 변하지 않고 이음새도 터지지 않는 장화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할 때 그의 뒤에 서 있는 죽음의 천사를 보고 '자신의 육체를 위해 없어서는 안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지혜'가 주어지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6 년째 되는 해에 찾아 온 쌍동이 여자 아이들을 통해서 답을 깨닫게 되는데, 그 아이들은 6 년 전에 미하일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목숨을 거두라고 지시받은 산모의 아이들이었다. 너무 불쌍해서 그 명령을 거역하다가 벌을 받게 된 것이었는데, 바로 그 어머니가 낳은 아이들이 같은 동네의 다른 가정에 입양되어 귀하게 자란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그가 깨달은 것을 말하면서 다시 천사로 돌아 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나는데, 조금 길지만 여기 그의 마지만 나레이션을 옮긴다.


"나는 모든 인간들이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낳고 죽어가던 그 어머니는 아이들이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는 힘이 주어져 있지 않았다. 또, 그 신사는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중략) 내가 사람이 되었을 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내 스스로 자신의 일을 걱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길을 가던 한 사람과 그의 아내의 마음에 사랑이 있어 나를 불쌍히 여겨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다. 또 두 고아가 잘 자랄 수 있었던 것도 한 여자의 진실한 사랑이 있어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있기에 살아가는 것이다.

이전에도 나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내리시어 그들이 잘 살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또 다른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떨어져 사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각자 자기에게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늘 깨우쳐주지 않았으며, 서로 모여 살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신 것이다.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사람이 오직 자기 자신의 일을 생각하는 마음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저 인간들의 착각일 뿐이고 실제로는 인간은 사랑의 힘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차있는 자는 하나님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사람 속에 계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결국 사람은 관계를 맺는 타자와 사랑을 주고 받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결론을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어서 소개되고 있는 소설인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는 아주 짧은 소설이고 그 내용에는 우리가 예화 등을 통해서 이미 익히 들어 온 이야기가 들어 있다. 즉, 어떤 사람이 하루 안에 다니면서 표시한 모든 땅을 소유하게 된다는 거래를 했는데 결국 너무 욕심껏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무리하다가 죽어서 결국 자기가 묻힐 정도의 조그만 땅만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나는 그것이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있던 이야기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이야기의 원전이 바로 이 소설이었다.

한 가지는, 그 예화는 결론 부분의 이야기일 뿐 이 소설에는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역시 묘사되고 있다. 주인공인 바흠에 대해서 악마가 조금씩 욕망을 키우도록 충동하는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 간 것인데, 간절히 원하던 땅을 차지하게 되고 풍성한 수확을 거두자 약간 부족한 부분이 보이게 되고, 그 부족한 것을 채우고자 갈등하게 되고, 더 큰 땅을 원하게 되는 과정에 마지막에는 비현실적인 유혹에 넘어가서 결국 앞에 이야기한 거래를 하기까지 치밀한 악마의 간계에 넘어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세상을 살면서 얼마든지 우리가 볼 수 있고, 또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멈추지 못하는, 우리 인생사의 모습일 수 있는데 톨스토이는 이를 우화적으로 그리면서 우리에게 잠깐이나마 생각할 거리를 남겨 주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그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은 정확히 2미터 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끝으로 실려 있는 소설인 '바보 이반'은 삼형제(원래 사남매)의 이야기인데, 도깨비의 계략이 번번이 형제 가운데 제일 모자라는 듯 보이는 이반에 의해 무산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에서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앞의 두 소설에 비해서 이 소설의 마지막은 노동을 통해서 먹고 사는 이반의 나라를 소개하며 끝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친절한 '인터넷'을 뒤져 보니 위키피디아가 간단하게 톨스토이의 의도를 설명해 주기를, 이 소설은 당시 러시아 귀족층의 사치와 무위도식을 비판하고 농민들의 근면을 찬양하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한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 소설은 21세기를 살아 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크게 공감되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심정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복잡한 사회는 그리 단순히 선과 악이 구분되기 힘들 뿐더러 "손에 굳은살이 배긴 사람은 대접을 받을 수 있지만 손에 굳은살이 없는 사람은 남이 먹다 남은 것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이반의 나라의 관습을 소개하는 마지막 구절 역시 지나치게 단순화된 도식일 듯 싶다. 물론 '손에 굳은살이 배긴다'는 것이 단순히 육체적인 노동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데살로니가 후서 3 장 10 절에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 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것과 12 절의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하는 말씀의 의미하는 바 '일하는 것'에 대한 교훈으로 해석하자면 무리가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소개되고 있는 이반의 형제들에 대한 묘사가 조금 장황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 형들도 하나는 군인으로서 다른 하나는 상인으로서 자기의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농사를 짓는 이반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여기까지가 지금 나의 생각이고, 아마 다른 의미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로 시작하여 세 개의 소설을 읽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므로 자투리 시간에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